로그인해 주세요
앤써구독신청
 
G500신청
 
G500 프리미엄신청
 
휴지통신청
무료신청
앤써 지정배포처
앤써 기사
앤써 최신기사
청춘의 거리 샤로수길
거리마다 똑같은 가게, 비슷한 카페. 색다른 장소가 없을까 생각했다. 프랜차이즈 업체...
평등한 삶을 위한 위대한 ...
우리는 매일 각종 미디어와 사람들이 쏟아내는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필요한 정보를...
달콤한 휴식
무더위가 대체 뭐라고.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쉽게 짜증나고 우울해진다. 하루의 시...
인기기사
교육뉴스
앤써 기사 > 앤써힐링
학부모기자칼럼 - 그리운 그 사람 작성일 : 03.15(수)
written by Editor 최수선,김현영,이소영 hit:956

01_그리운 그 사람
지독히도 외로웠을 한 남자
Written by 최수선


우리 집은 딸만 셋이다. 막내딸인 내 위로 언니 둘이 있다. 딸 부잣집에서 아빠가 겪었을 외로움은 어땠을까. 막내인 나까지 딸로 태어나자 아빠는 조금은 절망했을 것이다. 남자로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털어놓지 못한 감정들…. 나와 언니들은 여자인 엄마 편들기에 바빴다. 떠올려보면 단 한 번도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빠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리운 아빠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는 두 아들을 낳았다. 지금 내가 꾸린 가정에서 여자는 나 혼자다. 아이들이 어려서 아직은 괜찮지만 점차 두 아들이 커서 나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아갈 때 내 기분은 어떨까. ‘아들들이 조금이라도 엄마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나는 느닷없이 아빠께 죄송하고 아빠가 그립다. 한없이 미안하고 한껏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여기 없다. 나는 6살, 4살 된 아들들에게 투덜거리곤 한다.
“너네 다 크면 내 등은 누가 밀어주니?”
살아생전 아빠는 주로 거실 소파에 긴 다리를 쭉 뻗고 누워 계시는 날이 많았다. 자주 우울해보였고 항상 신경이 예민해 있었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빠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으며 나 또한 아빠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날들이 많았다. 그때는 그것이 모두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으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빠는 친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남자로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도 사람이라고. 나는 지금 너무 외롭다고.
그와 나의 추억
아빠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말기에 발견해서 수술을 한 번 했으나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의사로부터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아빠는 진료실 책상 위에 엎드려 펑펑 우셨다. 한 번도 행복하신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마저 그렇게도 힘들게 가셨다. 아빠는 어릴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구두닦이를 해서 큰 형의 대학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러나 큰 형은 아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셨다. 아빠는 좌절했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셨을 것이다. 그런 아빠를 단 한 번도 위로해드리지 못했던 나는 그가 너무도 그립다.
어릴 때 아빠와 나는 배드민턴을 자주 쳤다. 감정기복이 심한 분이었지만 함께 배드민턴을 칠 때는 한없이 자상한 아빠였다. 내가 신나게 라켓을 휘두를 수 있도록 좋은 방향으로 공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나는 지금 두 아들들과 몸으로 신나게 놀아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죄송합니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조금은 아빠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너무 미워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02_ 그리운 그 사람
전학 온 소녀
Written by 김현영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예쁘고 큰 눈이 매력적인 똑똑한 여자아이가 읍내에서 전학을 왔다. 선생님은 그 아이를 소개했고, 마침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히셨다. 그 아이는 “난 미영이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내 꿈은 음악선생님이 되는 거야”라며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나도 손을 내밀었다.
예쁜 생일 선물
미영이의 도시락엔 언제나 하얀 쌀밥 위에 달걀 프라이가 놓여있었고, 소고기 장조림을 비롯해 날마다 바뀌는 반찬들이 신기하고 부럽기만 했다. 책보자기에 싼 내 도시락은 항상 고구마와 김치가 전부였다. 미영이는 광주에서 태어났고, 아빠가 경찰 공무원이며 외할머니가 충장로에서 포목점을 크게 하신다고 했다. 나의 외할머니는 이곳 섬마을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고 미역, 김 등을 채취하며 살고 계신다고 얘기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겪으며 자란 탓에 소통의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고, 법대생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해주었다.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간 뒤 교실에 둘만 남았을 때였다. 미영이는 생일 축하한다며 내게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다. 내가 망설이자 ‘괜찮아. 빨리 받아. 집에 가서 풀어보고 내 생각 많이 해. 알았지?’라고 했다. 순간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집에 돌아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선물을 뜯어보았다. 예쁜 필통이었다. 그리고 필통 속에는 ‘친구야, 생일 축하해.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더 친하게 지내자’라고 쓰인 쪽지와 함께 잘 깎인 연필 두 자루, 지우개와 칼이 들어있었다. 잘해준 것이 없어 미안했다. 같이 공부하며 틀린 문제를 가르쳐주고, 반장으로서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하고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었다.
용기 없는 바보
운이 좋게도 우리는 5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다. 그 아이가 반장을 하면 내가 부반장을 했고,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공동 과제를 내주셨으며 운동회 때는 짝꿍이 되는 등 함께 하는 일들이 많았다. 어설프게나마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가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 미영이와 도시락을 바꿔 먹었다. 엄마가 사카린 물에 국수를 삶아 저어주면 후루룩 먹어치우곤 했던 나에게 미영이의 도시락은 처음 느껴보는 특별한 맛이었다. 친구들은 우리를 질투했고, 운동회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짓궂은 친구 녀석들이 교실에 남아 미영이의 도시락을 먹어 버리기도 했다. 나는 우는 미영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6학년이 되던 날 학교에 미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인사 발령에 따라 광주로 가버린 것이다. 미영이가 말없이 떠나버린 날 고온에 시달리고, 그토록 마음이 허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 많이 하라고 했던 그때 미영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곱씹어 보니 이제야 그 숙제를 풀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미영이를 좋아했으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하고 보내버린 ‘용기 없는 바보’였음을 말이다.



03_ 그리운 그 사람
그때 우리를 사랑했던 선생님
Written by 이소영

요즘은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인이 있을 뿐 예전에 비해 진정한 교사는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두 아이를 공교육 현장에 노출시키는 부모가 된 지금 때론 부모님처럼 우리를 아껴주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던 은사님들이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2017년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늘 그러하듯 내 앞에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서 나도 누군가의 인생길에 때론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고마운, 또 가끔은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있게 한 것들
나만의 교육 철학과 나름의 교육관을 갖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별 다른 사교육은 하지 않고 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아이들과 함께 성장을 거듭하다 보니 최근에는 교육 관련 칼럼을 쓰기도 하고,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을 하는 기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작은 성장에도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타고난 천성도 중요하지만 주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나도 학창시절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고교 6년 동안 운이 좋게도 우리 반 담임선생님들은 대부분 영어선생님이셨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교과목보다 영어 과목에 특히 집중했고, 덕분에 타 과목에 비해 영어 성적은 늘 좋았다. 이는 나중에 졸업 후 유학이나 진로를 정할 때 그리고 오늘날까지 내 커리어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선생님의 눈물을 본 날
평소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감사하게도 늘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사실 특별히 누군가를 그리워 해본 적은 별로 없다. 늘 인연이란 오고 감을 반복한다는 것을 알기에 주위 지인들에게 지나치게 전전긍긍하거나 특별한 미련을 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든 건지 철이 든 건지 학창시절 은사님들이 자주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사범대를 나와 엄한 집안 어르신들 몰래 서울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 최종시험까지 합격을 하셨는데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결국 아나운서의 길을 포기하고 다시 교편을 잡으셨던 분이다. 그래서 그만큼 열정이 넘치셨고 수업도 정말 재미있었다. 승부욕이 대단하셔서 우리 반이 학년 중에서 늘 최고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수학여행 이후 너무 들뜬 탓인지 학기말 고사 때 반 전체 영어 평균 성적이 심하게 떨어져서 단체로 체벌을 받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교복 치마 위에 굵은 지휘봉으로 허벅지를 2대씩 맞아서 멍이 들어 몇 주 동안 목욕탕에도 못 갈 정도였다. 하지만 체벌을 받은 후 이상하게도 분하거나 억울한 감정보다는 가냘픈 체구의 미세하게 떨리던 선생님 팔 걱정이 앞섰다.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는 선생님의 눈가에 얼핏 보이는 눈물에 더 마음이 아팠다. 순수한 소녀 시절 어린 마음으로 느꼈던 그 때 선생님의 진심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목록
샘플신청 자세히보기
목록보기
회사소개 제휴광고문의 개인정보취급방침 사이트맵 해오름 앤써샵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