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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교육의 원조, 60년의 내공을 펼치다 - 거창고등학교

작성일 : 14.08.04(월)

written by Editor 김민정photo by 홍경택

명문고의 비밀
전인교육의 원조, 60년의 내공을 펼치다 - 거창고등학교

첫 눈이 오면 뒷산에 토끼를 잡으러 가고, 계절마다 2박3일씩 수업을 전폐하고 예술제다, 야영이다 행사를 진행하느라 공부는 뒷전이다. 선생님들은 월급이 적고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을 택하라고 가르친다. 공부엔 뜻이 없는 시골 학교인 듯 보이지만 대입 실적은 입이 떡 벌어진다. 인성교육의 원조로 유명한 거창고 이야기다.
Written by 김민정 Photo by 홍경택

요즘 들어 소위 ‘잘 나가는’ 명문고들이 공부보다 강조하는 것이 있다. 인성교육과 예체능교육이다. 1인1기, 1인1체 등 신흥 명문고들이 부랴부랴 체계화해 선보이고 있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의 원조가 궁금해질 무렵,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는 거창고의 ‘직업선택의 십계’가 눈에 띄었다. 사회적 존경이나 장래성이 전혀 없는 황무지 같은 곳으로 가라니, 어찌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 하나는 이 학교에서는 뭔가 남다른 교육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성교육, 수준별 반편성도 우리가 원조

거창고 강당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액자가 하나 있다. 멋들어진 서체로 쓰여진 ‘직업선택의 십계’는 거창고의 교육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자기 삶을 사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 천부의 재능을 계발하는 사람, 빛과 소금처럼 사는 사람. 우리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라면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출세나 명예, 권력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을 하고 있지요.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면서 즐겁고 행복해야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창고가 명문고로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열된 입시교육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한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거창고는 전인교육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무려 61년 동안 한결같이 인성교육을 강조해온 거창고가 조명을 받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특목고도, 자사고도 아닌 일반계 고등학교에 불과한 이 학교에서 과연 얼마나 특별한 교육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에 유상철 거창고 교감이 꼽은 세 가지 비결은 자율성 교육, 만남의 교육, 교사의 헌신적 가르침이다.

“거창고는 교복, 명찰, 선도부원 등의 규제가 일체 없어요. 학업과 학생행사 모두 학생 주도로 이뤄지고 있고요. 학생들 스스로 뜻을 세우고 자율적으로 학교생활에 참여하고 있어요. 학습부분에서도 자율학습의 비중이 큽니다. 단, 지역특성상 유명학원이나 개인과외가 여의치 않은 만큼 교무실과 교실을 개방해 수시로 개인별, 그룹별 학습지도를 진행하고 있어요.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 만남과 소통을 통해 효과적인 학습은 물론, 바람직한 인성까지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수준별 반편성을 가장 처음 시행한 것도 거창고다. 자신의 실력에 맞춘 학습이 실력향상의 지름길이지만 막상 수준별 반편성을 하려면 교사가 자칫 성적에 따른 차별을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고, 학생들에게는 열등감 및 우월의식을 키울 수 있어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거창고가 영어와 수학 과목에서 자신의 학습능력에 따른 반편성을 통해 일취월장한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데에는 오랜 역사가 뒷받침된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입시와 인성교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교사의 헌신 덕분이지요. 밤이 되면 총 25명의 교사 가운데 5~10명이 항상 10시 반까지 교무실에 남아있어 찾아오는 학생들과 개별면담을 하고 개인과외를 해주기도 합니다. 시골이지만 입시정보와 입시지도 방법을 모으고 개발하려는 노력을 통해 전문적인 진학지도도 하고 있고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자율 활동을 잘하는 것도 거창고의 자랑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도록 끝까지 지켜봐주는 전인교육이 오늘의 거창고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 아닐까. ‘거고정신’을 잘 대변하는 어느 졸업생의 답사를 소개한다.
“거고인 건축가가 세운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거고인 농부가 키운 작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거고인 의사는 삶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거고인 판사가 내린 판결은 믿을 수 있고, 거고인 직공이 만든 옷은 단추가 잘 떨어지지 않으며, 거고인 선생님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다. 거고인 관리는 뇌물을 받지 않고, 거고인 기자는 거짓을 전하지 않으며, 거고인 역사가는 그 무엇보다 진실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세상은 거고를 빛이요 소금이라고 한다.”

학업과 행사활동의 조화가 만든 시너지 효과

거창고는 졸업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학교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등학교의 기억은 즐거움보다 입시의 압박과 괴로움이 더 컸기에 졸업 후에 모교를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말이다. 하지만 거창고 졸업생들은 특히 봄이 되면 꼭 학교에 방문한다. 봄 예술제 때문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가 봄 예술제거든요. 2박3일 동안 수업을 전폐하고 다양한 예술제와 마라톤 등의 체육대회를 진행합니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지막 날 대동놀이죠. 재학생과 졸업생이 어우러져 추는 ‘거고춤’은 정말 장관이에요. 계획하고 준비하는 모든 활동을 전부 학생들이 주도하기에 거창고의 대표적인 행사이자, 교육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3까지 빠짐없이 일체의 수업을 하지 않고 행사에만 몰두하다니 다른 학교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거창고에는 계절마다 행사가 넘쳐난다. 봄에는 봄 예술제, 여름에는 야영, 가을에는 합창제와 연극제, 가을소풍, 겨울에는 이웃돕기 바자회인 한나눔터와 첫눈이 오는 날 토끼몰이까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임순영 입학담당관은 학업과 행사의 절묘한 완급조절이 오히려 학습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고 귀띔한다.

“공부만 하면 학생도 지치고 교사도 지쳐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끼리 모여 있다 보니 특히 성적이 나오면 침울해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거든요. 그럴 즈음에 행사를 통해 기운을 북돋아주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거죠. 공부 외에 잘하는 게 있으면 자신감을 얻어 다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거든요. 다른 학교에 비해 공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서 그런지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것 같아요.”

거창고 졸업생들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추억은 첫눈 오는 날이다. 눈이 오면 1교시부터 교사들이 눈 오는 상황을 체크한다. 어느 정도 눈이 쌓이면 수업을 중지하고 전교생이 뒷산에 올라가 토끼몰이를 시작한다. 말이 토끼몰이지, 사실 눈밭을 뒹굴며 눈싸움을 하느라 전교생이 하나가 된단다. 어린 시절에나 가능한 경험들을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들에게는 굉장한 추억으로 남는다고. 인터뷰 내내 함박웃음 지으며 신나게 설명하는 이들을 보며 교사도 학생도 진정으로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직업선택의 십계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최첨단 학교시설과 차별화된 학습 커리큘럼을 바라고 거창고를 찾았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9500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의 자긍심이 남다른 것은 남과 다른 길을 가라고 말하는 거창고의 거침없는 가르침 때문일 게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과는 정반대의 길이지만 3년 후 사회에 나가 배운 대로 실천할 이 학생들의 미래가 더욱 더 기대되는 것은 입시위주의 현실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거창고만의 내공 때문이리라.

Q 수많은 명문고 중 거창고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경진 다른 고등학교처럼 세상의 부유함, 성공만을 좇아 좋은 대학가서 반듯한 직장 얻는 걸 목표로 하는 학교라면 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거창고는 나만 잘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주변, 내가 보지 못하는 소외된 곳에서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을 길러내고 있더라고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반대되는 시각이 매력적이었어요.

재영 거창고를 졸업해 의사가 된 지인이 있었는데요. 문과 출신으로 법대에 들어가 유학을 갔다가 이과로 진로를 바꿔 의사가 되었어요. 전혀 다른 전공을 망설임 없이 선택한 게 신기해 이유를 물었더니 ‘하고 싶어져서, 나에게 더 맞는 것 같아서’ 그랬다는 거예요. 거창고의 가르침대로 새로운 걸 배워서 후회가 없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더불어 그에게 주체적인 가치관을 심어준 거창고가 궁금해졌죠.

Q 거창고의 명물, ‘직업선택의 10계’ 중 나만의 베스트를 꼽는다면?

경진 아홉 번째인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를 꼽고 싶어요. 세상을 바꾸려면 누군가가 모험을 나서야 되잖아요. 누군가가 해주겠지 기다리기 보다는 내가 먼저 하는 게 멋지지 않나요?

재영 저는 두 번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가 가장 와 닿았어요. 사실 저도 처음에는 치과의사처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을 진로목표로 삼았었거든요. 그런데 거창고에 와서 기계도 만지고, 글도 써보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해보니 내가 가진 능력을 타인을 위해 쓰는 일의 보람을 알게 되었어요. 나눌 수 있는 삶을 목표로 제 꿈도 바뀌었답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학교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나요?

재영 7월에 가는 봄 야영과 크리스마스 전후에 열리는 한나눔터를 빼놓을 수 없죠. 1박2일 동안 가는 야영에서는 텐트 치는 것부터 고기 굽기, 음식준비, 장기자랑 무대 앰프와 조명 설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준비를 학생들이 직접 해야 해요. 책임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죠. 그리고 이웃돕기 바자회인 한나눔터는 수익금 전액을 불우한 이웃에게 전달하는 뜻 깊은 행사예요.

경진 봄 예술제를 통해 친구들과 소중한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특히 대동놀이를 하면서 이틀 동안의 체육대회에서 과열된 분위기를 아우르며 서로 멋있다, 수고 많이 했다, 다음에도 이런 모습 보여 줬으면 좋겠다고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하는데요. 어느 누구 하나도 뒤처지는 사람,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함께 거고춤을 추다보면 처음 보는 신입생들은 물론, 졸업생들과도 신기하게 친해져요.

Q 거창고에 와서 찾은 나의 꿈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재영 우리나라 여론을 보면 냄비처럼 확 끓었다 확 식어버리잖아요. 아직 생각이 자리 잡지 않은 학생들로 인해 한 사람이 매장당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정확한 사실, 즉 진리를 전하는 기자나 PD가 되고 싶어요.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의식을 거고에서 배웠거든요.

경진 저는 나라의 전반적인 경제정책을 알고 있는 기관에서 일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경제문제 중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거든요. 빈부격차에 대한 고민에 해결하고픈 큰 포부가 있지요.

★ 후배에게 한마디
경진 거창고는 전형적인 명문고의 틀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그러니 돈 많이 버는 직업, 명예 있는 직업만을 꿈꾸며 이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으면 해요. 멀리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볼 때와 가까이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다르거든요. 소외된 곳의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준비가 된 학생들이 와서 많은 것을 배우면 좋겠어요.

재영 공부에만 매달리고 학원에서만 있었던 학생들은 거고에 어울리지 않아요. 거고의 생활은 사실 그리 거창하지 않거든요. 공부만 하는 학생이라면 행사에 시간을 뺏긴다고 여길 수도 있고요. 하지만 놀때는 놀고 공부할 땐 확실히 공부하는 게 거고인이라는 걸 명심했으면 합니다. 거고의 행사를 경험해보면 단순히 공부 몇 시간 더 하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다는 걸 느끼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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